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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공감력이 높은 사람인가? 혹은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어떤 사람이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 혹은 공감을 잘해준다,고 평하곤 한다. 아는 후배가 이직해서 들어간 중견기업의 회장님은 심한 케이스였다. 밤 9시에 사무실에 돌아와서 야근하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다들 어디 갔어?” 직원이 당황해서, “회장님, 지금 9시입니다”라고 했는데, 그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러니까! 다들 일 안 하고 어디 갔냐고?!!” 어처구니없는 일 같지만, 불과 몇 년 전의 실화다. 후배는 곧 퇴사했다. 공감력 제로 상사 밑에서 일하기가 너무 괴롭다면서.


공감은 키울 수 있는 능력일까?
공감력은 변하지 않는 걸까? 공감에 대한 흔한 가정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공감이 선천적인 성격이라서 변하지 않는다는 것, 둘째는 공감은 즉각적인 반사작용이라는 것이다. 일례로 여성이 공감 능력이 더 높다는 오랜 속설이 있는데, 그건 맞는 것일까?


이걸 실험한 학자들이 있다. 실험에서 남녀 참여자들에게 ‘감정적인 대화 비디오’를 보게 한 다음 비디오 속 화자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맞혀보라고 했는데, 과연, 남자들이 여자보다 감정을 잘 알아맞히지 못했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후속 연구에서 조건을 약간 바꿔서, 화자의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돈을 지불하게 했더니, 공감 능력 면에서 성별 격차는 싹 사라졌다. 또 다른 연구팀은 남성들에게 여자는 ‘세심한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말해 일종의 ‘조건화’를 했는데, 그 말을 들은 남자들은 더 공감에 노력했고, 실제로 공감력이 높아졌다. 마치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 배에 힘을 주는 것처럼, 감정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다. 이 연구들이 말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가 의도적으로 공감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공감은 지능이다, 자밀 자키, 2021).


한마디로, 연습으로 공감을 키울 수 있고 더 친절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나는 가끔 경청이 힘들다고 하는 사람에게, 상사의 말은 어떻게 경청하느냐고 질문한다. 높은 사람의 말은 더 적극적으로 경청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은근히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면 공감도 경청도 어렵다. 스티븐 코비는 ‘사랑은 동사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사랑을 우연한 것, 불가항력적인 운명, 즉각적으로 빠지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사랑에 관한 한 그렇게 수동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 사랑을 선택하고 가꾸고 키워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교훈이 깊다. 공감도 그렇다.


지나친 공감의 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공감도 지나치면 기운이 빠질 수 있다. 이걸 ‘공감 피로’라고 한다. 가족의 간병을 떠맡은 사람, 널뛰는 자녀의 감정에 지나치게 공감하는 부모도 공감 피로를 느낀다. 신생아 집중치료실 간호사들은 다른 과보다 더 많은 불면과 플래시백, 탈진 같은 ‘2차 트라우마’를 보고했다. 아기의 고통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공감 피로에는 상담과 명상이 도움이 된다. 감정을 누르거나 맞서지 말고, 자신의 감정을 살피고 돌보는 것이다. 진정한 공감은 자신을 착취하지 않으며, 그래서 공감의 끝에서 분노를 만나지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타인의 고통을 떠안지 않으면서 그들을 염려하는 일이다. 심리학자들도 ‘공감으로 인한 괴로움’과 ‘공감으로 인한 염려’를 구분한다. 괴로움은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 떠안는 것이다. 반면 염려는 누군가의 감정을 함께 느끼고 그들의 안녕이 향상되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염려와 괴로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보이지만 똑같은 것은 아니다. 공감의 역할이 친절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면, 친절의 첫 번째 대상은 나 자신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도우면서 우리가 혜택을 입는 것이 진정한 공감일 것이다.

* 칼럼에 대한 회신은 helenko@kookmin.ac.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