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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01년 페르시아 제국 깊숙이, 진을 친 그리스 원정대는 공포와 혼란에 사로잡혔다. 약 만 명의 그리스 용병대는 키루스에 고용되어 참전하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키루스의 전사로 반란군은 와해하고 그리스 용병대만 페르시아 한가운데에 고립되고 만다.

페르시아 왕은 전 지휘관을 자신의 진지로 유인하여 살해한다. 이에 그리스 원정대는 큰 혼란에 빠지고 탈출할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크세노폰(Xenophon, BC.431 ~ BC.354)이 나서서 항복하는 것은 노예로서 오욕의 삶을 살다 결국 비참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모두 힘을 합친다면 무사히 탈출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그는 우선 각 단위 부대별로 지휘관을 새로 선출하고 명령계통을 명확히 하고, 군율을 새로이 확립하고 선출된 지휘관들이 모든 면에서 모범을 보여 줄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전열을 재정비한 그리스군은 오늘날의 터키 남부의 산악지대를 통과하여 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지로 가는 약 1,600km의 장정에 나섰다.

그리스군의 행군은 그야말로 끔찍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눈 덮인 산악지대의 강행군은 기본이고 식량과 보급품을 구하기 위하여 주변의 호전적인 부족들과의 전투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산악지역의 가난한 부족들에게는 겨울에 그리스군에게 식량을 빼앗긴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터키 중부의 타오키 족의 마을에서는 여자와 아이들까지 나서 언덕 아래의 그리스군에게 돌을 굴렸다. 돌이 다 떨어지자 마을 사람 모두가 벼랑 아래 몸을 던져 자살하는 참혹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역경을 극복하고 크세노폰은 그리스군을 목적지에 도달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기록이 2400년 후에 서구의 리더십 교재로 널리 활용될 것을 예견이나 하듯이 아래와 같은 리더십 프로세스를 일관되게 적용하고 있다.

1) 한 구간의 행군과 전투가 끝나면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여 과정을 평가한다.
2) 다음 행군의 목표와 수행 방안을 제시한다. “더 좋은 방안은 없는지?”, “자신의 제안에 허점은 없는지?”라는 질문을 통하여 지휘관 간 활발한 토론을 유도한 후 최종 결정에 이른다.
3) 지휘관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통해서 전 군사들과 공유하여 목표 달성의 공감대와 장병들의 자신감을 강화한다.
4) 전투 시에는 진두에서 지휘하고 행군 시에는 병사들과 고난을 함께 한다.
5) 공정한 보상과 처벌. 자신이 모범을 보이고 반복되는 토론을 통해서 규율을 확립한다.
6) 병사들의 노고를 인정하고 사기를 진작시킨다. (예: 체육대회)

그는 그리스로 돌아온 후 아나바시스(Anabasis; 그리스어로 ‘더 높은 곳으로 ’라는 뜻)라는 이름의 저서로 이 모험을 기록을 남겼다. 수십 년 후 알렉산더 대왕은 그의 책을 읽고 소수 정예의 군대로 아시아를 정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고, 오직 자신의 용기와 의지로 낯선 땅에서 온갖 고난을 헤쳐나가 목표를 달성하는 그의 행동은 오랫동안 서구 지도자의 모범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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