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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왕의 DNA를 타고난...”이란 말이 유행이었다. 경계성 장애 어린이 치료를 위한 교육기관의 자료 한 줄이 이처럼 일반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단지 희화화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우리 모두에게 잠재돼 있는 인정욕구, 자존감 욕구를 건드려서 인 것 같다. SNS에선 자기가 얼마나 멋지고 잘난 사람인지, 말 그대로 왕의 DNA 못지않은 존재감을 과시하는 사람들로 넘친다. 털끝만큼이라도 내 자존감과 자존심을 다치지 않고자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 논란을 보면서 ‘진짜 왕의 DNA’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조선시대 현명한 왕의 대표적 인물인 세종을 살펴보자. 김슬옹 세종 국어문화연구원장은 "세종이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은 부지런해서도, 머리가 좋아서도 아니고 주위에 현명한 질문을 통해 의견을 수렴해서였다."라고 말한다. 가령 5마리 용이 나타나 승천했다는 보고를 들으면 무조건 부인하거나 경탄하기 전에 구체적 질문으로 현황을 파악했다. 장소와 때, 본 사람, 모양 등 용의 형태에 대해 구체적으로 질문했는데 요즘의 5W1H형식이 무색할 지경이다. 구체적 사실에서부터 사례에 이르기까지 이런 질문이라면 가짜 뉴스에 현혹되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든다. 진짜 왕의 DNA는 인정욕구가 아니라 질문 재능, 호기심이란 생각이 들진 않는가?


공자는 사후에 문선왕이란 시호를 받은 자타 공인 성인이다. 그는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한 리더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질문하며, 배우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子曰: "不曰 '如之何如之何' 者, 吾末如之何也已矣)라고 말했다. 공자가 태묘(주공의 묘)에서 제사를 주재할 때였다. 묘지기에게 제사 관련 예절을 일일이 물어보며 자문을 구하니 주위 사람들이 "제사의 기본예절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흉봤다. 제자가 뒷담화를 전하니 공자는 불쾌해하긴커녕 "현장 실무자에게 물어보는 게 예절"이라고 답한다. 중국의 고대국가 상(商)나라가 망한 것은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탁월한 재능과 용맹에 도취해 주위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해서였다.


'스테이 풀리시, 스테이 헝그리(Stay foolish stay hungry)'는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한 명연설의 화두다. 스테이 헝그리는 그렇다 치는데, 스테이 풀리시는 왜일까? Stay Smart 해도 시원찮은데 어리석은 상태를 유지하라니. 리더가 스스로 '스테이 풀리시' '어리석다(愚), 모른다'라고 생각하며 자문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리더의 반증이어서다.


학습하는 조직을 만드는데 두 가지 스타일을 취한 리더가 있었다. A 리더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하며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스스로 댓글을 달며 최대한 성의 있게 답을 주고자 했다. B 리더는 "나는 이 분야를 잘 모르니, 잘 아는 사람이 나서달라"라고 부탁하고, "문제 요인이 무엇인지 같이 해결해 나가자"라고 말했다. A와 B, 어느 리더 조직의 성장이 빨랐겠는가? 짐작하듯이 B형이다. 리더가 다 알아서 한다고 생각하면 집단지성을 구하기 어렵다. 헛똑똑이는 모든 것을 아는체하지만, 진똑똑이는 어리석은 듯하며 여러 의견을 통합한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리처드 니스벳과 타소미 윌슨은 미국의 한 백화점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사람들에게 4가지 종류의 스타킹을 비교해 보고 어떤 것이 더 좋은지 답해달라고 요청했다. 모두 같은 제품이었는데도, '차이를 모르겠다'고 털어놓은 사람은 드물었다. 자신이 고른 것의 감촉이 더 부드럽거나 색이 마음에 든다는 식으로 근거를 설명했다. 이 실험을 통해 연구진이 밝힌 것은 "사람들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얘기하기를 어려워하며 어떻게든 자신이 안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이다.


요컨대 "나도 모른다"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 본성상 희소자원이고 리더십의 본체다. 요즘 유행어대로 하자면 진짜 왕의 DNA다. '큰 지혜는 어리석음과 같다'(太智若愚)는 말은 작금에도 통한다. 당신은 얼마나 "나도 틀릴 수 있다", "나도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 정확히 최근 2주일간 몇 차례나 말한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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