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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곡동 근처에 매봉터널이 있다. 터널의 남쪽 방향으로 지나다 보면 바로 오른쪽에 한 동 솟은 아파트에 카피라이터가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남향이라 햇볕도 잘 들어오고 살기에 괜찮은 곳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굴지의 대기업이 아파트 바로 앞에 고층 스포츠센터를 세운다는 소식을 발표했다. 아파트 앞에 커다란 벽 하나가 세워진다는 말이다. 그 당시 아파트 주민들은 결사반대를 외쳤다. 그는 세입자였지만 순전히 카피라이터라는 이유로 아파트 모임에 끌려 나간다. 반대모임에서는 대기업 횡포를 고발해서 아파트에 호의적 여론을 만들자고 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 손에 떠밀려 현수막 카피를 써야 했다. 보통 떠올리는 현수막 문구는 이렇다. “아파트 코앞에 초고층 빌딩이 웬 말이냐! 시민 삶 짓밟는 누구누구는 각성하라!”


그는 사람 사이에 갈등을 야기하는 이런 카피는 처음부터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들과 같이 집단 이기주의로 보이기 쉬울 거라는 판단에서다. 그는 저항, 분노, 투쟁 대신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이 햇볕을 받고 자랄 수 있게 한 뼘만 비켜 지어주세요.” 이 카피를 가슴에 품은 현수막이 아파트 높이만큼 걸렸다. 여론은 나쁘지 않았고 이 현수막은 TV 뉴스에까지 소개된다. 결국, 스포츠센터는 햇볕을 가리지 않을 만큼 정말 한 뼘 옮겨서 지어졌다. 그의 카피는 고발이나 대결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우리 아이들 이야기를 했기에, 사람 이야기를 했기에 울림을 줄 수 있었다. 그것은 또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었다. 대통령의 카피라이터로 알려진 정철의 오래전 이야기다.


의도가 좋아도 부정적인 말로는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인간의 뇌는 부정형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뇌는 말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 반대되는 모습을 그려내지 못한다. 뭔가를 조심하라, 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자꾸 더 그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반전운동이 그렇다.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운동은 그럴듯하지만 사실 반전운동을 할수록 더 많은 전쟁을 야기한다. 마약과의 전쟁도 효과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원하는 것보다 원하지 않는 것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테레사 수녀는 그런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다. “나는 반전 집회에 결코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평화 집회를 한다면 초대해 주세요.” 무언가를 반대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말이 중요합니다. 명칭과 호칭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말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광우병 사태가 바로 그렇습니다. 처음 스코틀랜드에서 소가 이 병에 걸렸을 때 농민들은 소가 미친 걸로 알고 광우병(mad cow disease)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원인도 증상도 모르는데 잘못된 이름이 붙으면 대응에 실패할 수 있고 이를 우려한 세계보건기구는 증상대로 소해면상뇌증(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일명 BSE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소 뇌에 해면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광우병이 발생했는데 신문 방송은 광우병이란 말을 피하고 공식 명칭 BSE로 보도했고 별다른 일없이 조용히 끝났습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광우병이라고 부르는 나라와 BSE라고 부르는 나라 사이에 이런 차이가 있는 겁니다. 언론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집니다. 언론은 사전경보기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근데 현재의 언론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역할을 합니다. 별 도움이 되지 않지요. 뭔가 달라져야 합니다.” 〈지의 최전선〉(2016)이란 책에 나온 내용이다.


좋은 의도로라도 부정적인 말로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반기업 정서란 말이 나온 후 반기업 정서는 급격하게 늘었고 님비라는 말 이후 님비현상은 가속화되었다. 뇌물수수 의혹을 받을 때 리처드 닉슨은 TV 연설을 통해 “전 사기꾼이 아닙니다.”라는 반박의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로써 사기꾼 의혹을 더 받게 되었다.


인간은 말로 생각을 한다. 말로 설득을 한다. 말로 결심을 한다. 말로 조직을 이끌어간다.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 근데 부정적인 말은 가능한 쓰지 않는 게 좋다. 뇌는 부정과 긍정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주와 모욕의 언사는 어떤 경우에도 쓰지 않는다.’ 조지 워싱턴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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