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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 Coaching Letter From CMI
 
   
달음은 무엇일까? 깨달음은 자유로움이다. 말과 행동과 판단에 있어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상식에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보면 속이 시원하다.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해결된다. 사물을 정확하게 본다. 자기 의견이 분명하고 표현도 잘 한다. 자기 감정도 잘 알고 있다. 물론 상대의 생각과 감정도 잘 알고 있다.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많이 공부해야 한다. 근데 무조건 많이 배웠다고 깨닫는 건 아니다. 많이 배워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있다. 자유롭긴커녕 꽉 막혀 사람을 답답하게 한다. 자기만의 세계를 주장하고 다른 사람의 얘기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난 어떤 사람일까? 

깨달음이 왜 중요할까? 깨달아서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일까? 인도의 성자라 불리는 라즈니쉬는 이렇게 말했다. “깨달음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자유로움이다. 깨달음을 통해 자유로워지는 것이지 깨달음이 목적은 아니다. 가장 위대한 것은 자유이다.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고, 영향 받지 않고 자기가 만들어낸 생각과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생각을 붙들면 생각도 썩는다. 생각이 부패하면 몸도 부패하고 몸이 부패하면 질병이나 암이 생긴다. 진짜 수련은 생각을 붙들지 않는 것이다. 나는 깨달으면 모든 의문이 다 해결되고 풀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 의문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 의문이 사라지는 것이다.” 

깨닫기 위해서는 늘 가슴 속에 숙제를 갖고 있어야 한다. 해결하고 싶은 아젠다가 있어야 한다. 고민하고 생각하다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법정은 깨달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우리는 좋은 말을 듣기 위해 바쁜 일상을 쪼개어 여기저기 찾아 다닌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번번이 실망한다. 좋은 말은 무엇인가? 어디에 좋은 말이 있는가? 무엇 때문에 그 좋은 말을 듣고자 하는가? 아무리 좋은 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해도 내 자신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어떤 좋은 말도 내게는 무의미하고 무익하다. 좋은 말, 좋은 가르침은 사람의 입을 거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주만물이 매 순간 그때 그곳에서 좋은 가르침을 펼쳐 보이고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참으로 많은 좋은 말을 들어왔다. 지금까지 들은 좋은 말만 가지고도 누구나 성인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말이란 그렇게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의 삶에 이어지지 않으면 말이란 공허하다. 자기 체험이 없는 말에 울림이 없듯이 그 어떤 가르침도 삶으로 구체화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중국의 석학 이중텐의 말은 이렇다. “불교의 근본은 무엇인가? 각오(覺悟)이다. 무엇이 불(佛)인가? 불은 불타(佛陀)를 말한다. 깨달은 자다. 각오는 불교에서 온 말이다. 성불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 자각(自覺)이다. 자신이 깨닫는 것이다. 둘째, 각타(覺他)다. 다른 이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셋째, 각행원만(覺行圓滿)이다. 깨달음과 행함이 원만하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부합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보살(菩薩)은 앞에 두 가지는 부합하나 마지막 한 가지가 부족하다. 사람이 부처나 보살과 다른 점은 바로 깨달음에 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각오는 성불의 관건이다.” 

대승불교의 최고 경전이라고 일컬어지는 화엄경에서는 네 종류의 ‘법계(法界)’를 이야기한다. 깨달음의 네 가지 차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이무애(理無碍)의 법계이다. 형이상학적 이치에 걸림이 없는 단계이다. 둘째, 사무애(事無碍)이다. 현실 일 처리에 걸림이 없는 단계이다. 셋째, 이사무애(理事無碍)이다. 형이상학적인 이치뿐 아니라 현실의 일 처리에도 아울러 통달한 경지를 말한다. 마지막 넷째, 사사무애(事事無碍)이다. 일과 일에 걸림이 없는 단계를 가리킨다. 최고의 경지는 사사무애이다. 

알레테이야(aletheia)란 말이 있다. 그리스어로 깨달음을 뜻한다. 이 말의 어원은 촛불을 끈다라는 뜻이다. 별빛을 보려면 눈앞에 있는 촛불을 끄라는 것이다. 인터넷 수준의 얄팍한 지식을 갖고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성의 작은 촛불을 끄지 않고는 대우주의 별빛을 볼 수 없다. 가까운 작은 산이 먼 큰 산을 가리고 있듯이 작은 지식은 늘 큰 지혜를 가리고 있다. 어둠이 가장 짙을 때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
* 칼럼에 대한 회신은kthan@assist.ac.kr로 해주시기 바랍니다.